아직도 죽ㅡ 죽ㅡ 내리는 저 빗소리가 아마도 인류의 죄를 씻어 주고 싶어 저렇게도 줄기차게 내리나 보다고 생각한지 이미 오래된 오늘도 또 비가 온다.  새벽 여섯 시쯤 삼청 공원의 골짜기는 긴 장마로 인한 물난리가 나 여기저기 할 것 없이 폭포 되어 내려가고 있다.

드높은 데서 흘러흘러 모인 곳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그득히 괴어 맴돌고 있다.  아침에는 조용한 산골이지만 낮에는 인파로 북적거린다고 한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산에 오른다.  새벽에 찾는 삼청공원의 골짜기는 마냥 조용하고 깨끗하기에 간혹 시원한 시냇가에 발 담그고 앉아 조용히 들려오는 산새 소리에 귀 기울임 또 한층 정답다.  마음껏  한두 시간 혼자 즐길 수 있는 장소인 동시에 마음 가볍게 와서 잠시나마 잡다한 생활 주변을 잊게 해 주는 산천이 한 없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종종 만나는 친우들도 좋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성모를 앙모하며 추상하는 것 들도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다.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산골짝에 올라, 때때로 심산유곡의 설악 영봉(雪嶽靈峰)을 그리워하며,  이곳이 설악 계곡이려니 하고 자위하면서 올해의 성하(盛夏)를 보내련다.

졸졸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먼 지난 날의 추억에 사로잡혀 보았다.  그때가 바로 재작년 겨울이었다.  설산 고송(雪山古松)에 앉은 까마귀 두서너 마리가 몹시 매혹적인 시정을 움틀거리면서 처량하게 혹은 신기한 공포감을 자아내던 겨울의 설악 산경이었다.

과히 싫지않은 풍취에 가끔 울려 오는 까마귀 소리와 함께 양지쪽 햇볕에 눈이 녹아 떨어지는 그 풍경이야말로 한 토막의 추억이지만, 아쉬움에 젖은 요즈음 생활에는 청신제처럼 싱싱하고 그리운 모습이기도 하다.   한참 쳐다보고 있노라면 내 몸마저 까맣게 물드는 듯한 까마귀 색에 취하던 느낌은 지금 새삼스럽게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터진다.  그 어떤 비밀을 엄수하고 있는 것 같은 까만 색이 무섭도록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 까마귀 한 마리가 땅에서 솔가지로 오르내리며 까악 까악 울어 예면서 어디론가 날아갔었다.

눈보라가 휘날렸고.

“까악 까악 까악” 산울림과 함께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양지쪽에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진흙 땅이 은근히 까마귀 오줌에 젖어 녹는 것처럼 까맣게만 보였었다.

지금 이렇게 삼청 공원에서 생각해 보아도 나도 모르게 기이하게 아물거린다.  그때 마침 하얀 산토끼 한 마리가 깡총깡총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면서 다람쥐를 몰고 나온 광경도 있었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젖다 깨어나니 발등이 몹시 차다  새벽이라서 너무 시원하여 머릿 속까지 찬 기운이 오른다.  다시 자세를 바꿔 앉아 먼 설악의 옥토끼를 그려보자 . 그는 겨울이 되면 한층 더 희고 고와지는 모양이다.  아마도 먹을 것이 떨어져 한상 흰 눈만 먹고 사는 까닭일까?  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특히 여름 더위에 시달리지 않고 가슴속부터 부담이 작아 날 듯이 시원하고 가벼운 마음이 되어 헛된 욕심도 잡념도 사라지고 마냥 즐거운 인생이 될 것이다.   요즈음 같은 식량난도 아랑곳없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도 되도록이면 까마귀보다는 하얀 토끼의 의복과 설식(雪食)을 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 정화 작용이 저절로 잘 될 것이라고 아침 한때 넋을 놓고 이러한 추념(追念)에 잠겨 보았다.

그리고 나무열매를 바라보며 때가 오면 열매 맺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음을 찬미하면서 여름의 겨울나그네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1964 카톨릭 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