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 여중고에서 시간 후 과외(課外)로서 수녀님들 시간까지 마치고 4시 36분발 기차로 성동역을 떠났다.  나도 모르게 급히 산 차표가 2등실로 자리잡게 되어, 다리를 쭉 펴고 편안히 창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목적지가 춘천이라 창 밖의 경치는 그만이다.

마곡리(馬谷里)쯤 왔을 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환상과 더불어 아랫길에 알 만한 자동차가 서울로 가고 있었다.

  어쩐지 미지(未知)라는 서글픔을 안고 마음을 돌려 춘천의 산천만을 생각하기로 하였다.  전설에 중국 청조(淸朝)의 조상 <全國>의 시조 소슬묘(墓)로부터 우두산(牛頭山)에 신 숭겸(申崇謙) 묘 등 그 옛날에는 충신들도 단심(丹心)으로 무척 순진하였던가 보다. 고려 태조 왕 건이 견훤(甄萱)에게 패병(敗兵)하자 신(申)이 태조로 가장하고 죽었다 한다.  이를 알게 된 태조는 쇠로 신(申)의 목을 만들어 붙여 이 곳에 장사 지내 주었다는 옛이야기, 그 생각으로 기차 안에서의 시간을 메웠다.  또 이런 생각도 해 본다.

  현대처럼 살기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는 우리들, 특히 중년 여성의 이기심이, 우리들의 도리에 맞지는 않으나 부지중 사소한 일에, 혹은 위험한 부정 불의(不義)위 길로 가게 된다는 것.

  물론 나쁜 일을 하고자 함은 나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허나, 위험한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어, 현재에는 실현되기 어려운 일을 그들이 원하고 있음은 시대의 조류(潮流)라고 하여 둘 것인가.  너무도 빤히 아는 현실적인 소원(所願)이지만 한 번쯤은 정신이 고달프든 말든 현재의 의무에 대하여 주의력이 산만하여졌으면 하고 원하는 것과 동경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돈의 위력일까?  아니다, 남편의 성격일 것이다

  이 얼마나 어지러운 세상인가--.

해가 바뀔수록 현저해지는 중년 부인들의 허무감이 큰 사회문제라고 생각 아니할 수 없다.

  어느 덧 7시경, 기차는 춘천역에 도착하였건만 별로 찾아갈 곳도 없고 기분이 어쩐지 우울해져 무조건 여관방으로 가서 누워 버렸다.  문을 잠그고 실컷 자고 나니 11시였다.

  밖에서 “과일 좀 사세요.” 하는 아낙네 소리에 사과 두 알을 사 먹고, 일어나 세수하고 발 씻고 개운한 기분으로 다시 누웠다.  잠이 안 온다.  고종 태왕자가 원주에 있던 관찰부를 춘천으로 옮겨 도청 소재지로 만들고 김정근(金楨根)을 관찰사로 시켜서 피난처로 하려다 중지하였다는데, 마침 나도 서울서 피난 온 것 같은 하룻밤이었다.  허무맹랑한 생각은 가래골 三八교로 걷어던져 버리고 아무리 잠이 안 온다고 옆방 말소리 따위 듣고 있을 수 없어 책을 펼쳤다.  마침 서기 1820년에 멜로스 다도해(多島海) 동굴에서 한 농부의 손에 의하여 파편으로 발견된 여신상(女神像)<멜로의 비너스> 생각으로 밤을 장식 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옮겨 쓰고자 한다.

  그 비너스를 본 불란서인은 곧 그 곳 주재(駐在)의 불란서 관리에게 말하여 바로 토이기 주재 불란서 대사(土耳其駐在 佛蘭西大使)의 귀에 들어갔다.  대사는 즉각 그것을 사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섬에서 한 희랍 승려가 그 여신상을 사서 콘스탄티노플의 유력한 사람에게 증정하려고 아직 현금만 안 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불란서 대사관원이 별안간 도착하여 멜로스 도에 현금을 내놓는 동시에 여신상을 선편으로 모국(母國)으로 보내 버렸다고 한다.

  먼저 증입(贈入)을 결정하고 다만 지불이 안 되어 있던 희랍 승려는 분개하여 항의를 제출하는 등, 도청(島廳)은 재판에 패하여 벌금까지 내놓는 등 하였지만, 결국 먼저 가지고 간 불란서가 승리한 셈이다.  저 유명한 <멜로의 비너스>는 발견된 파편을 모아 붙여서, 파리를 빛나게 하는 최고의 보물로 되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