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범이 보아라.
너희들 본 지도 며칠이 되었구나. 별일 없이 모두 무고하겠지. 공부도 꾸준히 잘 하고 아버지 말씀도 잘 듣는지 두루 궁금하다.
엄마는 아기 데리고 이 곳 설악 계곡에서 그림 많이 그리고 있으니 안심해라.

따스한 4월의 햇살이 이렇게도 따뜻하게 아기 놀고 있는 풀밭 위에 확 퍼지고, 혹은 훅하고 불어오는 봄바람이 설악의 흙냄새를 흠뻑 안아다 주고 있다.
엄마는 지금 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다보는 상쾌감을 엄마 혼자 맛보는 것이 어쩐지 너무도 아까운 것 같아 문득 너희들에게 편지나 쓸까 하고 펜을 들었다.

오래지 않아 오월이 되면 성모의 성월, 또는 어린이날 등이 다가와서 즐거운 날을 맞이함에 있어 어떻게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는지...
그리고 공부는 열심히 하겠지? 학생이 공부 빼놓으면 그 무엇이 할 일이 있겠니? 제발 공부 열심히 하여라. 아무쪼록 밥 잘 먹고, 공부 열심히 하면 그만이다, 응?

이제는 그 놈의 비행기 장난은 뜨악하겠지? 주일 날 잠깐만 비행기 날리고 오로지 영어 단어나 국어 낱말 외기에 바빠야 하는니라. 애들이 건강하고, 자기 일에 열중하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한다. 너희들은 남학생이니까 모양내거나 옷투정 하는 일이 없는 것만으로 엄마로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정말 고맙구나. 그저 커서도 너무 예쁜 여자는 해로우니 수수하고 마음씨 곱고 머리 영리하며 건강한 여자를 택하도록 하여라.
내가 왜 이런 말이 나요냐하면 엊그제 기범이가 말했듯이 세상이 빨라져서 고2에서 벌써 술·담배 먹고 여학생과 시시덕거리면서 학관의 공부보다 예쁜 여학생 만나러 다닌다는 그 애들 이야기가 생각나서 하는 말이니 똑똑히 명심하여 다오.
기범이는 물론 그렇지 않은 줄 알지만 염려되어 이 어미가 하는 이야기니 아예 귀넘어 들으면 안 된다. 적어도 스물 다섯 되기 전에는 그리고 자기 스스로 돈 벌게 될 때까지는 그런데 한눈 팔아서는 일생을 망치는 거야.
아직도 멀었다고 제쳐 놓고 그저 네 할 일만 하여라. 동생도 너무 때리지 말고 의좋게, 응? 더구나 엄마도 없는데 동생만 너무 부려먹지 말고, 그리고 용돈도 아껴 써라.

의사는 혀를 보고 사람의 건강 상태를 알아낸다는데, 너희들 요즈음의 너무 이상야릇한 말씨는 삼가야 하느니라. 너무 우락부락한 언행은 우리의 영혼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까.

항상 같은 친구, 나아가서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아무리 사내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너무 무섭게 싸워서는 안된단 말이다.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잊으면 이 세상을 보는 눈이 어두워지므로 언제 어디서나 제 민족과 타민족을 구별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거라.

말은 의(義)라 하고, 또 그 말로써 죄를 판단할 수도 있는 그 언행을 너무 이상하게 하지 말고.
그저 부지런히 내 할 일 함으로써 모든 것이 순조로이 풀려 나가게 되는 것이 이 세상살이가 아닌가 한다.
굶어도 남의 것은 바라지 말 것. 하물며 사내자식이 오죽이나 못났으면 남의 것을 바라겠니? 눈꼽만큼도 손 대서는 안 되게끔 되어 있으니 지금 부지런히 공부하여 너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나 들어가면 좋겠다. 꿀벌은 일하면서 놀고, 놀면서도 꿀 외는 입도 안 대고 일만 하니 진짜 꿀을 주는 동시에 항상 자기 일에만 몰두하니 그 작은 곤충이지만 우리들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겠니?

지금 저 쪽에서 놀고 있는 아기는 풀 뽑으며 흙장난이 한창인가 보다. 무심히 놀고 있는 너의 꼬마동생이 보고도 싶겠지만 한 사나흘만 더 참고 있거라. 너희 엄마는 이렇게 사방으로 돌아다녀야 할 운명을 지고 있으니 너희들에게는 미안하다만 천주께서 주신 숙명이라고 생각하여 더욱더 분발해서 좋은 그림 많이 그려 가마.

그럼 이만 그친다.
우리 기범이, 기평이 잘 있거라.
갈 때에는 이 곳 산나물과 동해의 자질구레한 마른 바닷고기를 가지고 가마.

안녕

4월10일, 엄마로부터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