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약 5년전 일입니다. 처음 미국에 와서 브루클린에 살면서 자연히 아이들에게 많이 쓰게 되고 따라서 신공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특히 방지거 성인이 좋아서 일본어로 된 그 분의 서간문(신심 생활 입문서)이나 자서전을 애송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정이 들고 또 혼자서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틈틈이 그 분의 글을 번역도 하며 음미하다가 어느덧 그분은 나의 지도 신부님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 책은 내가 계성소학교 5학년 때 교리문답시험에서 일등상으로 받은 책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책은 6.25를 겪을 때도 내 주머니나 핸드백 속에 따라다녔고 내가 겪어온 슬픔이나 억울함에서 항상 변함없이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또 격려해 주던 책입니다.

그날도 늦도록 그림을 그리다가 말고 그만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꿈에 나 홀로 어느 들판을 한없이 걷다가 옆에 흘깃보니 한 여행용 밴트럭 앞에 어떤 백인 남자가 한디리를 쭉 뻗고 지친 듯이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강도라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떨결에 재빨리 그 앞을 지나 가려는데 또 갑자기 그 남자는 바로 많은 고아들을 돌보고 계시는 성인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다시 한 번 흘깃 쳐다보았습니다. 몸이 음짓 할만큼 쏘는 눈초리와 깡마르고 조그마한 그 분의 체구에서 이상하게도 사람을 억누르는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느끼고 나는 부끄러운 감정에 비틀거리며 풀밭을 걷는데 거기에는 그 성인이 돌보는 거지꼴을 한 많은 고아 아이들이 앉아 있음을 보고 놀라서 꿈을 깨었습니다. 이상한 꿈도 있구나 생각하며 눈길을 시계로 돌리니 그때 새벽 5시 40분이었습니다.

나는 늘 하는대로 묵주를 쥐고는 방석에 앉아서 조는 듯 몽롱한 상태에서 신공을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성난 검푸른 바닷물결이 출렁이며 서서히 나에게로 다가오는데 바로 아까 꿈에 보았던 그 무서운 눈하나가 잽싸게 바닷물 한 가운데 박히면서 성난 파도처럼 둥글게 원을 그리며 내가 앉은 자리마저 흔들림을 느낄 때 마침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습니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려 전화를 받으니 백남순선생님이 오늘 맨하탄 30가 근처에 예수님 그림 전시회가 있으니 같이 가자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부지중에 얼른 "네, 네"하고 약속을 해드리고 또다시 아까 그 환각 속에 묻히고 싶어서 앉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상태가 꿈속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날 나는 백선생님과의 일과를 끝내고 헤어지기 전에 성 방지거 성당에 잠깐 성체조배를 하고 가기로 서로 합의를 했습니다.

성체조배를 마치고 복도를 걸어 나오며 백남순선생님께서 사무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시며 나에게 "잠깐만"하고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바로 그때 나는 바로 옆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 한 장에 눈길을 보내다가 나도 모르게 "악"하고 입속으로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포스터는 바로 새벽 꿈에 보았던 그 백인 남자와 꼭 같은 눈동자를 가졌는데 그 밑에는 "방지거 성인"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홍당무처럼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습니다.
나는 이제 근 40년이 되도록 방지거 성인을 앙모(仰慕)해 왔었지만 아직 한 번도 그 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었는데 새벽 꿈에 본 그 분의 모습과 포스터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같음을 느끼고 나는 무슨 비밀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기뻤습니다.

사무실 앞에서 머뭇거리던 백남순선생님이 우리집 가정을 위해 생미사를 바치시겠다고 우기셨으므로 나는 우리 막내가 며칠 전에 소 신학교에 입학했다고 자랑을 하였더니 백선생님은 나를 꼭 껴안아 주시면서 어머나 좋아라 하시면서 우리 꼬마 신부님과 또 우리집 가정을 위해 생미사 예물로 $5을 수사신부님께 바치셨습니다. 수사신부님은 미사예물은 $2이상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하시며 거스름 돈을 내주셨지만 백선생님은 한사코 $5을 다 바치겠다고 고집을 하시자 그 수사신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부터 저녁 8시 사이에 빨리 된 순번으로 생미사를 올리시겠다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수사신부님께 감사 드리고 각자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날 저녁 막내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얼굴이 핼쓱해서 들어와서는 하는 말이 뒤에서 누가 총을 드리대는 것 같아서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는 것입니다.
막내를 진정시키고 그날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보니 아르바이트로 도와주던 삼촌의 그로서리 가게에서 삼촌의 실수로 가게 문을 잠그지 않고 전깃불을 먼저 꺼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틈에 백인강도가 술 냄새와 마리화나 냄새를 풍기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들어와서는 맥주를 달라고 하며 돈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권총을 꺼내서 막내의 얼굴에 갖다 대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답니다.
이제 열 다섯 살인 막내는 기겁을 하고 자기는 주인이 아니고 돈도 없고 또 주인은 저 뒤쪽에 있다고 얼떨결에 말했답니다.
강도는 그 아이의 등에 총을 겨누고 삼촌이 있는 뒤에까지 가서 삼촌에게 손을 들게 하고 그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는 두 사람에게 땅에 엎드려 있으라고 해놓고는 뒷걸음질을 쳐 유유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막내가 소름끼치게 무서워하는 점은 그 강도가 술과 마약에 취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면서 권총을 막내의 등에 대고 뒤쪽에 있는 삼촌에게까지 가는 동안 실수로라도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막내는 그 남자의 쏘는 듯한 문초리가 너무 무서웠다고 하길래 나는 언뜻 무엇이 집히는 듯해서 종이를 꺼내 새벽에 본 그 남자의 얼굴을 그려보였습니다. 그랬더니 막내는 더 한층 놀라며 엄마가 어떻게 그 사람을 보았는지 다그쳐 물었습니다.

나는 삼형제 앞에서 새벽에 꾼 그 꿈 이야기를 해주었고 또 오늘 성 방지거 성당에 바친 미사예물 카드를 내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대뜸 큰아들이 오늘 방지거 성인께서 틀림없이 그 강도의 마음을 잘 진정시켜서 더 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잘 돌보아 주셨음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진정 그시간에 우리는 생전 처음으로 받은 이 큰 생미사의 은혜에 대해 다같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감사했습니다.
믿는 자는 산다는 기쁨을 외치면서...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받은 이 생미사의 은혜와 일생을 두고 앙모(仰慕)해 온 방지거 성인께서 특히 요즈음 나태해진 나의 신앙생활을 몸소 깨우쳐 주신 이 신비한 기적같은 사실에 우리는 잠시 묵상하였습니다. 아울러 천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바칩니다.
또 이때가 한국 전주 성체회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난 동생 발바라 수녀의 일주기가 되는 추사이망 때 이므로 이 글을 수녀님의 영전에 바치며 또 수녀님도 천당에서 우리 삼형제를 기도해 줄 것을 부탁드리고 또 우리 모두가 더욱 열심한 신자가 될 것을 다짐하면서 이 글도 맺습니다.

(방지거 성인: Francisco 성인)

신앙체험수기, 1984년 뉴욕 퀸스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