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방지난동무설(炎方地暖冬無雪)이니,소소려엽우우(疎疎慮葉雨雨)하고 고인들도 읊으며 즐기던 저 유명한 대흥사 단풍이 굉장하다는 말을 듣고 기회를 노리던 중 예술제의 초대 아닌 초대를 받아 끝날 무렵에 뛰어 내려갔다.  통일호 선로변에 파아랗게 펼쳐지는 호남평야의 지평선이 정다웠다.   저쪽 하늘 끝으로 실려 보내는 대낮의 꿈은 학창 시대와는 달리 좀 짙은 서글픔으로 물들어 붉게 번지는 빚이 흡사 나의 씻기지 않은 마음의 빚과도 같은 애달픔이었다.

약  이십년 전에 이곳에서 겨울방학을 지냈던 일이 어제같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첫날은 해남 전주의원 이 원장 댁에서 숙식하기로 하고, 저녁 식사 후 예술제 연극부 활동을 보았다.  순박한 정서가 넘쳐흐르는 시골의 문맹 퇴치상을 그린 내용이었다.

순수한 우리 생활의 무대 장치 하며 배경, 내용 등이 장내 한 구석에 있는 나를 십 년 전, 이십 년 전의 나로 이끄는 듯하여 무한히 즐거웠다.   밤 열한시쯤 끝을 맺고 숙소로 돌아왔다.  여류화가라고 하여 군수 이하 경찰서장 또는 교육청 인사까지 여러 분들이 다녀가면서, 낮에는 점심차 대흥사로 안내하겠단다.  그 절은 신라 때 진덕 여왕의 소원으로 이루어졌다고 쓰여 있었다.   절 이름을  그 당시는 대둔사(大屯寺)라고 하였으며, 타지에서는 보기 드문  비전각(碑殿閣)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온 신경을 곤두세워 세어도 틀리곤 할 만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석들이 있었다.  전부 예순 여섯 개나 된다고 한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일행이 심계루(沈鷄樓)까지 두루 설명해 주고 돌아간 후, 정해 준 여관에 짐을 풀고 홀가분한 차림새로 성급히 산으로 향했다.  황홀 속에 방황하는 신록의 청풍(晴風)은 비단결 같아 보드라운 훈풍이 살랑살랑 나부끼고, 코에 스며드는 풀냄새가 온몸에 휘감겨서 나는 잠시 선녀가 된 기분으로 무아경을 헤매었다.   진정 다른 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청풍과 작엽 송림이 끝없이 매혹시켜 무언가의 넋에게 흘리는 것 같았다.   세조 때, 시인 정 인지가 수접부상만리천(水接扶桑萬里天)이라고 부르면서 넋을 잃고 동쪽 바다를 앙천하였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어둠을 헤치고 하산하였다.

여자로서 나같이 단신 여행을 자주하는 사람도 드물겠지만  항상 암자에 머무른 탓으로 여관방은 이번이 처음이다..  혼자 실컷 감상에 빠져 한적한 여름 밤을 지새웠다.   어쩐지 잠못 이룬 우심의 밤이 하얗게 밝아, 청정한 햇빛이 여관방에 비쳐드는 시각은 마치 죽음의 그 후에 오는  적막함에서 구원해 주는 듯 햇살이 너무도 반가웠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 수도녀(修道女) 같은 마음으로 개울에 나가 세수하고, 그 길로 대웅전으로 발길을 옮겨 새벽 기도 나가는 사람처럼 단숨에 가 보았다.  가지가지의 새소리만 요란하게 들리는 새벽인데 여자가 방정맞게 대웅전 문고리를 열고 정면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은 없었다.   나는 마음놓고 부처님께 꾸벅 절만 한번 하고, 듣기만 하던 모친탐방기행도(母親探訪紀行圖)앞에 이르렀다.  그 그림은 국보 불화(佛畵)로서 굉장한 구상과 기교가 뛰어나게 재미있는 점을 보아, 이백 일 걸려 부처님께 기도한 후 그렸다고 하는 말에 수긍이 가므로 나는 나대로 진지한 맛 한량없어 무려 시간 반이나 바라보아도 싫증이 안났다. 그 이외에도 볼 것은 많았지만 배가 고파 숙소로 내려왔다.   다시 산을 헤매다 때마침 청신암 쪽에서 내려온 손님들과 같이 어울려 노래 부르고 춤추는 틈바구니에서 잠시 즐기다 허둥지둥 빠져 나와 마지막으로 서산대사 유물 안치소에 들렀다.  탑산사 동종(塔山寺銅鐘)이 묵중히 알방 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보물 88호로서, 금이 많이 섞여 있기로 유명한 금동종인데 푸대접 받고 있는 상태 였다.  가난한 우리나라 탓으로 미루고 다음은 서산대사의 생존시 쓰시던 유물을 보았다. 

백 팔십 년 전의 문화가 깃든 가지가지의 창백(蒼白)한 것이 귀중히 보관되어 마음 든든하였다.   마침 스님 한 분이 계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유물 중에 전설과 함께 빛나는 칠보 단장한 금십자가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부치는 스님 이야기가 암만 하여도 납득이 안 가는 말로 들렸다.

그 당시 서산대사 성덕을 찬양하여 멀리 로마 교황처에서 전도사를 보내왔다고 한다,  그런즉 그 전도사는 서산대사를 뵙자 대사의 고매한 인격과 위력에 감화되어 일언반구도 못하고 개종까지 하여, 제자로서 가지고 있던 금십자가를 대사께 바치고 그 밑에 꿇어앉아 불도를 닦았다는 이야기 이다.   나는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물어 보았다.   [그러면 그 서양 신부님의 물건도 하나 둘은 있을 법 하군요.] 하고 물어 보았더니, 스님은 대꾸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웬일인지 종교적 고심과 수긍 안 되는 점들이 가슴속에 꽉 차는 것 같았다.   유물은 열 두 종으로써 그 중에도 정종 대왕(李朝 2代)의 친선친필 병풍은 일본 놈이 훔쳐갔다가 자진해서 돌려보내왔다는, 그 중  하나는 평북 영변 묘향산 수충사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칠보 염주의 은은한 빛과 침울함은 그 옛날 대사의 욕정 억제의 도구로서, 서산대사의  체취가 스며 있는 듯이 구슬프게만 보였다.   칠보는 호랑이뼈, 호박, 수정, 백옥, 산호, 금속 등으로 엮어진 염주였다.   이튿날 그 태고의 산 속에서 나와 해남읍에 가서 그림 5,6 매를 유지들의 청으로 그려주고 서울행 하였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도 그 금십자가 이야기가 미심쩍어 모 잡지사 R씨에게 찾아가 이야기하였더니 펄쩍 뛰면서 하는 말이 [절간에서 중이 목탁이나 고이 두들길 일이지 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함부로 하는지 모르겠다.]며 그게 그런 것이 아니라 약 삼십년 전 부산방(富山房)발행 사학잡지(史學雜誌) 성대(城大)의 경향지청구학총에 상세한 것이 실려 있다고 하면서, 명나라의 강화사(講和使)  심 유경의 선물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당시 구라파에는 칠보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고 덧붙여 주었다. 

중국의 심 유경이 서산대사를 찾아가 바쳤다는 이야기가 틀림없을 것이다.   대사께서 얼마나 애지중지 하셨으면 돌아가셨을 때 품안에서 나왔을까.  대사로 말미암아 금십자가는 더 한층 빛나는 평가로서 우리들 눈을 현란하게 한다.   그 금십자가야 말로 초(超)종차 친선의 역할을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유물 중의 하나인 금다라니함(金다羅尼函)속에 안치해 두었으면 싶다.

<1965 카톨릭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