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사(望月寺)에서 점심을 지어 먹고 20분도 못 쉬고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친우와 둘이서 산악 회원들 뒤를 따르기에는 아슬아슬한 미지수인 산길이 난(難)코스가 아닐 수 없었다.   동행한 K씨의 말을 쫓아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능선이 있는 곳까지 따라 갈 수 있었다.  그 동안 내 깐에는 적잖이 산을 찾아 다녔다고 생각했으나 이번과 같이 난로(難路)를 밟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러나 위축된 심신에 깨우침을 받은 자극 있는 하루였다.

도봉의 칠봉(七峰)중 다섯 봉우리를 엉거주춤 맨발로 기어대던 내 모습이 지금 새삼 우스워진다.  허나, 산 바위를 껴안고 애무하며 온몸을 온통 바위에 맡겨 그를 움켜잡고 놓칠세라 있는 힘을 다해 안간힘 쓰던 나, 쓸쓸한 가을빛 채풍(彩風)을  몸 속속들이 받으면서 맑은 공기를 양껏 마시는 기분이야말로 더할 수 없는 가을의 감촉이리라.

하늘을 뚫고 우뚝 솟은 바위들의 장엄한 조형 예술적인 포대(砲臺)는 참으로 금강산 이상의 가경(佳境)이다.  검은 바위 허리에 보기 좋은 단풍잎은 잔잔한 미풍에 잠든 아기 선녀들 같아 보였다.  우글우글 잡목 우거진 산길을 지나 드높이 쳐다 보이는 도봉산 포대에서의 시간은 하오 다섯 시쯤이었다.  엄각을 돌고 돌아 오르고 또 내려섰다는 도중, 나는 나도 모르게 앞서 가는 남자에게 이렇게 외쳤다.  “손만 잡고는 안 되겠어요! 숫제 좀 안아서 내려 주세요!”

가파른 길을 가느라고 조마조마한 마음이 됐던 일행들은 위기에서 벗어나 한 숨 돌리자 허리를 쥐고 이 말을 우스워 했다.

나도 덩달아 무감각하게 웃었다.  허나 나는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치미를 떼었다.

험준한 산길에서 서로 돕는 것은 아름다운 인간미의 발로일 것이다.  그런 인간이 다급한 경우를 만나면 너나없이 동심(童心)으로 돌아가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산은 점점 아름다운 신비로 나를 매혹하면서 강한 바람과 함께 숭고하였다.

또한 그 부동의 자세는 믿음직한 신뢰감과 이 세상 귀한 그 무엇을 내 안에 심어 주었다.

단조로운 회색 빛 생활에서 지금껏 방황하던 내가 오랜만에 산선인(山仙人)들이 사는 별천지에 온 것 같은 우월감마저 느끼면서 우리는 과실을 먹었다.  해맑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환상을 쫓다. 태양에게 보내는 사모심(思慕心)같은 강한 자극과 감상을 느끼면서 나는 멀리멀리 퍼져가는 그리움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마음 한 구석 떠오른 환상은 젊음과 화려와 엉뚱함을 되찾고 싶은 내 느린 성격의 유희라 할까?  천치 같은 나를 새삼 꾸짖으면서, 고대(古代) 스페인의 프랑스경(境)의 환락적 해수욕장으로 수호성자(守護聖者)로 받드는 성(聖)세바스티안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는 번영한 스페인의 세바스티안가(街)로 내 순정의 날개는 날기 시작했다.

눈 앞에 비록 신기루 같은 것일지언정 따라 가 버리고 싶은 야릇한 심정이었다  성(聖) 세바스티안은 청년 사관으로 장렬하게 순직한 미남자라고 한다. 늘씬한 체격과 그의 깊은 신앙심을 찬양한 그 당시 신앙 깊은 여성들은 그를 애통 해하여 서러워 한 나머지 종내는 그 사모가 애욕으로 변질되어 갔다고 하는데, 나도 수긍이 가는 자연스런 여자의 종교심이다.

부드러운 여심(女心)들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선혈에 키스하면서, 그에게 매달려 옷깃에 염착(染着)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새삼 머리에 떠올랐다.

바윗등에 걸터 앉아 그들의 모습을 눈에 선하게 그리면서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포대를 스치는 바람결이 제법 거세다는 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옛날 태고 적, 하느님께서 이 바람에 깜짝 놀라 깨어나 도봉  칠봉을 정성들여 만들었다는 전설도 그 때 새삼 생각났다.

바람이 거세지만 좀 쉬어가자는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나는 내심 기쁨을 머금고 나대로의 혼자 생각에 잠겨 외람된 연가(戀歌)를 칠봉에 보내었다.

이십년 전으로 돌아간 나는 동화 속의 소녀가 되었다. 쓸쓸한 감상(感傷)을 지닌 소녀의 기도문은 우람한 산등성 바위의 수복에 아름다운 메아리를 짓는 것 같이 아름다웠다.

“성스런 산, 그대가 나를 내셨으니, 나는 그대 받들어 섬기고 내 생명과 영혼의 능력을 몽땅 그대에게 드리나이다.”

눈을 떠보니 둘째 봉우리가 온통 붉은 산호덩이이다.  다음 셋째 봉우리는 그보다 더한 황금덩이가 아닌가?  그러나 황금에의 애욕은 좋지 않다 그러니 지나치게 미치는 것은 삼가야겠다.  저 아래 계곡을 향해 있는 곳에 찬란한 햇빛이 반사하고 투명한 수정산이 빛나고 있지 않은가. 거기서 내 화폭은 아름다움에 당장 붓대를 쥐게 하는 충동을 일으켰다.

영봉(靈峰)의 정기(精氣)를 받아 나의 그림이 더욱 빛나기를 기원하면서, 다음 내 시선은 그 옆의 호박 보석산으로 돌려졌다.  한 동안 현란한 보석들이 나를 매혹시키더니 이윽고 다시 백금으로 노다지가 되어 있는 산봉우리가 보인다.  내 혀를 그 가까이 대어 보면서 그를 찬양하고 노래 불렀더니 다음 일곱 번째 봉우리가 호랑이 형체로 내 앞에 나타났다.  지금까지의 즐거움이 한꺼번에 무서움으로 돌변하면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칠보 염주(七寶念珠)가 낱낱으로 흩어져 내게로 굴러오는 환각이 보였다.  깜짝 놀라 의식이 돌아온 나는 그제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괴상한 망상 속에 열중해 있던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K씨와 친우가 함께 웃고 있었다.

일곱 색(七色) 선명한 삼종에 빨간 놀이 뒤덮인 풍경을 뒤로 하고 우리는 아쉬운 귀로(歸路)에 올랐다.

산이라 하면 금강산과 설악산을 연상하던 내 머리에 이제는 도봉의 숭고함과 염미관(艶美觀)이 떠오르게 되었다.   아름답고 장엄한 산에는 그것이 알려졌든 않았든 우리가 이끌리고 마는 것이라 하겠다.

<1976 여류명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