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나 한여름이면 나는 훌쩍 서울을 떠나, 깊은 산속의 거찰(巨刹)이나 소암자(小庵子)를 찾아가는 일이 가끔 있다.

도시에서 시달린 머리를 식히고 겸해서 새로운 화제(畵題)를 얻기 위한 나들이라, 행장도 간단한 화구를 지닌 간편한 차림이요,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아 더없이 홀가분하고 즐거운 여행인 것이다.

올해도 나는 남들이 가는 화려한 바캉스 대신, 막내아이를 이끌고 충청남도의 한 거찰을 찾아갔다.

도착한 즉시 절방에 짐을 풀고 우선 계곡으로 내려갔다.  검푸른 수목이 드리워진 짙은 그늘 아래 맑게 흐르는 산골짝 물에, 옷을 훌훌 벗고 몸을 담그니, 그 시원하고 상쾌함이란 도시에서는 전혀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수령(樹齡)이 얼마나 되었는지 헤아릴 길 없는 거목 사이로 빠끔이 뚫린 푸른 하늘, 싱싱하게 코에 와 닿는 녹음 내음, 종알종알, 짹짹, 북북 짖어 대는 산새들이 생기에 넘치는 우짖음, 인적 미답(人跡未踏)의 이 자연은 신비로움 마저 감돌아 원시를 연상케 한다.   분명 이세상의 한 곳임에는 틀림없건만, 마치 나는 갑자기 선녀나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 이 곳에 오기를 백번 잘 했다고 생각했다.

하루종일 속옷바람으로 앉아 있어도 무방할 정도로 아무도 오지 않는다.   지극히 아늑하고 한적하고 그저 자연뿐인 이 산골짝에서 나는 며칠을 멍청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복잡다난하기만을 하던 서울이 여기서 생각하니 싸움터같이만 떠오르고 집 걱정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당장 코 앞에 다가선 아이들 등록금 마련이며, 자질구레한 살림살이 걱정이며, 모든 잡념을 떨어 버리고, 그렇다고 화제를 구상하기에 머리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이 그야말로 무아의 경지, 머리를 텅 비운 상태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와 같은 지공의 머릿속은 말 할 것도 없고, 잠시 사람을 떠나 있다는 것, 어떤 도시림이나 파산이나 도전이나 의무 등의 온갖 세속적인 행위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라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완벽하게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지는 못하였다.  세 끼니를 떼우기 위해 절에 올라가야 했고 절 방에서 묵노라면 어쩔 수 없이 절 사람들을 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때때로 막내아이 손을 잡고 산책을 즐기기도 하였다.  아마도 절에서 손질한 듯한 깨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참깨 밭 등성이를 지나 저 아래로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는 옹달샘에서 그 앞에 배치된 양재기로 꿀맛 같은 약수를 맛보기도 하였다.  계곡물에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러 넘기고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올라 천불당(千佛堂)을 구경하였다.  기나긴 세월 풍상을 이기며 서 있는 고목의 뿌리가 따위로 꿈틀 드러나 있고, 텅 비어 있는 나무 밑동은 그 컴컴한 속을 들여다보기에도 온몸이 오싹할 정도의 거대한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으슥한 곳이었다.

 천육백 불(佛)을 한자리에 모셔 놓은 극락전(極樂殿)은 가장 내 마음에 드는 아주  조용한 곳이었다.  코에 스미는 분향 내음과 은은한 목탁 소리는 색다른 감회를 일으켜 왠지 모르게 내가 오래지 않아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 같은 서글픔조차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식(草食) 정도로 끼니를 메우는 무미건조한 소일 속에서도 자기 심화와 침전(沈澱)을 의식하게 했다.

따가운 여름 햇살이 해 맑은 모래땅 절 마당에 사정없이 쏟아지고 멀리 또는 가까운 데서 줄기차게 들려오는 매미 소리는 조용하기만 한 이 산속의 더위를 한층 더해 주고 있다.

며칠이 지나, 절 마루 끝에 걸터앉아 툭 터진 앞을 내려다 보고 있노라니, 행자(行者) 한 사람이 와서 내일부터 절방을 고치게 되니 웃방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이 절에서는 법당을 비롯하여 대대적인 보수(補修)작업을 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울긋불긋 단청을 새로이 하는 등 어수선하고 절 안팎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수도사다운 도풍(道風)이 풍기는 단구(短軀)의 주지 스님은 매일매일 인부들의 식사 대접이며 일당 분배하기에 바빴다.   한 뭉텅이의 지폐를 손아귀에 쥐고 인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얼마씩 나눠 주는 주지의 인자한 모습과 희색이 만면하여 노동의 피로를 잊고 지폐 몇 장을 받아 드는 인부들의 표정은 한 마디로 흐뭇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목도 하는 내 머릿 속에는 이 호경기(?)를 축복하기에 앞서 한 가닥의 의혹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크나큰 공사의 비용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무리 신도수가 많은 큰 절이라도 자체의 수입으로는 절의 현상유지 운영이 고작일 것이어늘, 지금 불경기에다 물가고로 살기 어려운 때이어늘, 이 절은 어떻게 이렇게 풍성히 돌아가는가?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것밖에 모르는 내 둔한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 주지 스님의 말씀이 “절 일이란 시작만 해 놓으면 부처님이 다 끝맺게 해 주시지요”하면서 얼마 전에 모 보살로부터 큰 시주가 들어와 그럭저럭 꾸려나간다는 것이었다.   모 보살이란 어느 유력한 인사의 아낙네를 지칭하는 것이요, 거액을 희사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듣자니까 서울 근교 명찰(名刹)에 모 인사가 거액을 희사했다는 소문이다.

그들은 그런 거액을 시주를 순순히 할 만큼 신심이 돈독한 것일까?   아니면 혹시 어떤 속죄를 위한 간구에서일까?  혹은 새로운 발전과 영화를 기원하는 기도일까?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세태가 어지러울수록 불교가 융성하고 사찰과 승려가 타락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굳이 오늘이 세태를 그 때와 비교해 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종교에 관한 것은 차치하고, 극히 일부나마 부유층의 부가 어떤 형태로라도 빈한한 사람들에게 분배된다는 것만이라도 쾌사 임에는 틀림없다.   시주자들이 신심을 구태여 분석해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 돈의 시발이 석연치 않는 것이다.

나는 모처럼 얻은 이 알뜰한 휴식이 더럽혀질까 두려워 얼른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버리고 출발을 서둘렀다.  이 값진 휴식을 누리게 해준 절에 대해 감사의 뜻으로 주머니를 털어 법당에 시주하려 하자 전부터 그림 관계로 안면이 있는 주지 스님은 내 사정을 감안했는지 굳이 만류하면서 차비까지 얼마를 보태는 것이었다.   나는 삼성현도(三聖現圖)와 부처사의 그림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하산하였다. 

다시 일상의 나로 돌아와 세사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 올여름의 산행은 그 어느 때 보다도 큰 수확이었다.   탈속이 며칠은 지금의 나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