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와 함께 만든 풀각시가 너무도 엉성하여 풀이 나빠 그렇다고 핀잔하면서, 어디 가서 뜯으면 좋은 풀을 따올 수 있을까하고 궁리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엄마는 풀을 살며시 소금물에 담그시더니 예쁘게 머리 딴 색시를 만들어 옷까지 입혀 주시면서 "이번 추석에는 너희들 옷을 꼭 해 주어야 되겠는데..."하시면서 걱정스러운 미소로 우리들을 감싸 주시던 때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일입니다.

마당에 채송화꽃이 만발하고 햇볕이 쨍쨍한 여름날의 언덕위 조그마한 양철집이 나의 어렸을 때 놀던 집입니다.
앞에는 맑디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뒷동산 가까운 곳에 성당 큰 십자가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어, 유난히 아이들이 그 돌에 오르내리며 놀던 성당 앞산 이야기가 아득한 옛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산 밑 양철집에 아로새겨진 엄마와의 생활은 가난은 했지만 아주 정다운 시골 풍경이었습니다.

그 속에 비치는 엄마 모습은 아기 업은 젊은 엄마만이 머리 속에 떠오를 뿐, 지금의 엄마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들은 한 줄기 세월의 흐름을 돌이키고 싶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 때의 엄마 나이가 스물 여덟 살쯤 되나 봅니다.
어느 날 외할머니와 엄마, 언니 그리고 나는 다 같이 농협 창고에 볏가리를 하러 갔습니다.
아버지가 서울 모처에 취직하여 상경하고 안 계시므로 우리집 살림은 어려웠던 것 같았습니다. 외할머니와 엄마가 열심히 볏가리를 하고 계실 때, 우리들은 볏섬 위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숨바꼭질했으니 더 말할 것 없는 나이였지요.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올 때, 그 곳에서 얻은 쌀 몇 됫박을 머리에 이고 오시던 엄마의 모습이, 산길에 아직도 남아 있는 저녁 놀에 엄마 옷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보이던 그 언덕길이 사무치게 그립다고 할까요.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 순간, 눈물이 핑 도는 나의 추억은 한없이 아름답고 소박한 삶이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찌는 듯이 더운 여름 날, 시원한 소낙비 한 줄기 뿌려 저 건너 산너머로 고운 무지개가 뜨면 마당에 내놓은 대나무 평상에 모여든 우리에게 점심 밥상을 차려 주시고는 어디론지 가시고 안 계시는데 보리밥에 상추쌈을 우리들만 맛있게 먹고 있을 때 동생이 쌀밥 달라고 보채던 일, 그러니깐 아마도 엄마는 그 당시 점심 진지도 제대로 안 드셨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일 저런 일 지나간 그 옛날의 엄마 생활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마음속 깊은 어디에서 누군가가 막 채찍질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 무엇이라고 할까요. 빨리 엄마한테 가보라고 외치고 부추겨 주는 듯한 편안감이 쉽사리 풀리는 듯한 억센 부르짖음을 느낍니다.
가엾은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항상 생각하면서도 고기 한 근 제대로 못 사다 드리는 나의 무성의가 안타깝게 마음을 흔듭니다. 자식된 보답을 못함을 뉘우치기도 하여 봤지요.
정말 정말 우리 엄마만큼 불쌍한 분도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도 끝끝내 참아 받은 인내심이 엄마의 마음과 몸을 희생시키고 오직 순진하게 바라보기만 할 만큼 거짓없으신 천성과 거기에다 말주변조차 없는 우리 엄마는 진정 한국 여성의 전형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나는 『그 마음씨가 뽀아요.』라고 어디서나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기르시느라 항상 헌 옷 나부랑이만 꿰매시는 엄마에게 철없는 우리들은 누더기 꿰매는 엄마라고 하면서 더없이 부끄러워하고 또는 김치 찌꺼기만 잡수신다고 핀잔 드리면서 어느 거지든지 거지만 오면 엄마 몰래 가져다가 쏟아 주고야 말았던 내가 우습기만 합니다.
이제금 모두 깨닫고 생각을 깊이 함으로써 그렇게 하심이 진짜 엄마라고 고개 숙여집니다.

눈물 나오도록 가엾고 불쌍한 우리 엄마의 가슴 곳에는 또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지요.
6.25때 행방불명이 된 엄마의 장남, 나의 남동생이 누구보다도 엄마 가슴에 못을 박아드린 아픔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엾은 엄마와 동생의 이별이 가져다 준 슬픔은 날이 갈수록 해가 바뀌어도 새로운 쓰라림을 맛보게 합니다.
누이 된 입장에서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미는데 하물며 엄마께서는 그 괴로움이 어떠하시고 그 얼마나 염려 되실까 하고 생각하여 봅니다.
그 당시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영문과 수재였으니깐 그 아까움과 핏줄에서 오는 그리움이 한시 한때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오늘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성모님께 바치는 신공과 정성으로써 그날 그날을 바쁘게 보내시고 계십니다. 어느 때는 다 함께 없는 돈을 모아서 동생 생미사도 드려 주지요. 그리고 엄마 모시고 꿈에 보이던 동생 이야기로 꽃을 피움으로써 눈꼽만큼이라도 위로가 될까 하고 우리들 형제들은 절로 우러나는 심정을 서로 털어 놓기도 하여 봅니다만 밑도 끝도 없이 하나도 뾰족한 일이 없음을 서러워 할 따름입니다.
우리들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38선이라는 경계선을 원망할 따름이지요.

결국 우리 엄마의 반 토막 인생은 38선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동생의 생사를 불문하고 우리 엄마의 간절한 소원은 성모님은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못박으시고도 몇 해를 살아 가셨는데 ― 하시면서 참아 받으시는가 봅니다.

이 날 이 때까지 고생만 하면서도 웃음지으시는 엄마의 부드러운 표정은 내 마음의 고향 제일호라고 때때로 생각하면서 역시 나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나의 꼬마들 얼굴도 함께 그려 봅니다.
물론 모두가 나에게는 소중한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1976년 카톨릭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