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성도 없는 야산풍경(野山風景)을 그리고 다니다가 아픈 다리를 쉬려고 풀밭에 주저앉아 들꽃과 들풀을 나도 모르게 들여다보다 말고 하도 예뻐서 매만지게 됐음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처음에는 물론 초가집 동네에 매료되어 그리기 시작하여 박정권 전까지 우리 나라 산과 들을 무던히도 누비고 다녔던 탓으로 많은 초가풍경(草家風景)을 그렸다고 자부함은 지난날의 그림쟁이들의 크나 큰 소재(素材)요 위안이었다.

가난한 우리 산천(山川) 시골집에서 오가는, 넉넉하지는 않아도 그 정다움을 못 잊어 자주 찾았나 보다.
그러므로 나는 초가산천(草家山川)을 본대로 느낀 대로 그리다 마침내는 늦가을의 배추, 무 등 김장 뽑아낸 밭을 금잔디로 메워 가면서 그려보기도 하였건만...
그리고 또는 이름도 없는 풀꽃을 가다듬어 갓난아기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매만지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면 갖가지 꽃과 벌레와의 대화를 엿듣는 시간이 마련된다.
요사이 들국화를 그리면서 그를 눈 여겨 살펴보면 지극히 예쁘고 향기 짙은 내음에 나도 모르게 살짝 취하는 것 같다.
자그마해도 완전무결(完全無缺)하고 줄기찬 생명체라는 것에 현혹됨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참말로 나를 웃긴다.
너무나도 째그마한 그것들이 한시도 조용히 그대로 있어주지 않는데 더욱 그러하구나....

대우주(大宇宙)는 많은 변화를 자아내지만 그토록 작은 벌레들에게도 낮과 밤 그리고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또다시 봄으로 변하고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틈바구니에 끼어서 나도 살겠다고 줄기차게 내뻗는 그들의 생명력이 가을이 되면 서글퍼짐을 느낀다.
삼라만상 속에서 어떤 날은 흐리고 바람불고 눈이 휘몰아쳐도 청천 맑고 화려한 날씨 등으로 말미암아 우주는 아름답게 가꾸어지지 않는가?
인간은 고인(古人)이 말한바와 같이 소우주(小宇宙)임에 틀림없다.
그도 역시 항상 같은 상태(狀態)가 아니므로 그도 그럴 것이다. 인간의 일생은 물과 같이 지상으로 퍼져 흐르고 변화스럽게 혹은 희망을 그리고 굽히며 공포에 싸여 떨다가 그 누군가의 값싼 위로의 말 한마디로써 흔들흔들하고 역경에 부닥쳐 또 좌절우절하면서 하루 한시도 전연 헛된 시작은 없지 않는가.

가을의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나뭇잎과 무명초를 접하면 나도 모르게 나의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그 무엇이 있다. 오직 내 마음의 자세를 생각게 됨은 계절 탓일까 아니 내 마음이 공허해 선가 이럴 때 찾는 우리 산천시골은 너무도 아름답고 정서(情緖) 넘치는 사람 사는 골짜기였는데... . 진짜 먹을 것만 있으면 묻혀서도 실컷 고독도 즐기고 살 수 있었건만... 지금의 우리 사회는 왜 이럴까?
배는 어디 어느 곳에 떠있으면서도 동서남북의 항로를 따라 어떠한 해풍(海風)에 휘말려도 그 나침반이라는 것이 있어 아름다운 북극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들었은데 우리 사회는 무엇이냐 말이다.
아니 남이야 어떻든 간에 나는 나에게는 북극성을 가지고 있을까? 잠시 내 마음의 물음에 대하여 반성해 보아야하겠다. 내가 하필이면 그 어려운 그림공부를 하게 되었을까?하고 자문자답(自問自答)을 천천히 하여 보았으나 꿀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다.
꿀 이야기 나왔으니 말이지난 그 꿀벌들은 넓은 들판을 횡단할 때 돌풍을 만나면 자기 몸의 무게를 알고 모래 한 아름 움켜쥐고 날은다고 한다. 물론 억센 바람에 휘날리지 않도록 미리 몸무게의 균형을 지키면서 가고자 하는 곳까지 뜻대로 날아가자는 심산일 것이다.
그 분수를 지키는 현명함에 또 한 번 놀랐다.

이렇게 미미한 것들에게 우리는 배워야 되겠다.
그들의 부지런하고 깨끗한 처세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요즈음에는 나는 항상 고립된 아 자신을 새삼 발견한다.
그 옆에서 사는 시골 사람들이 부러워 이제 곧 사라져 갔지만 훈훈한 초가삼간에 가서 살리라고 마음 굳히고 있음은 비단 희망에 지나지 않도록 생각하고 있다고 하여 두어야겠다.
논이랑 밭이 내다보이는 푸른 들녘을 마음껏 즐기면서 말이다.

1996년 10월
초가 풍경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