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에 빗소리를 듣고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가끔은 하늘도 쳐다보고 산다고 자부심을 가졌는데 십수년만에 화분을 내놓고 비를 맞추다 보니 빗소리까지 듣게 되는 호사를 하게 되었다.  비가 참으로 다양하게도 온다.  주룩주룩 오다가 부슬부슬로 바뀌다가 이내 다시 힘차게 주루룩 주루룩 끈질기게도 온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 맛이 좋은지 화초들은 금방 기운이 펄펄 나는 듯하다.  비 떨어지는 구경을 하면서 시간을 죽이다 보니 마음도 축축하게 젖어 드는 맛이 꽤 괜찮다.

먼 곳에 보이는 맨하탄 마천루 고층건물들 위에 떠있는 희뿌연 회색 구름 덩어리는 볼 때마다 느낌이 음산해 별로 안좋다.  공상영화에서 나오는 우중충한 맨하탄 모습처럼 하늘에 좋지 못한 기운이 떠있어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기운들이 엉켜 떠있는 듯한 정체가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아마도 싸가지 없이 모든 것을 화폐가치로만 따져대는 상업주의의 무정함이 뭉쳐져 공해 덩어리처럼 떠다니는 게 이렇게 보이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늘 높은 곳에서 한참을 날아 와  화초 잎사귀에 떨어지는 빗물을 보다가는 시름없이 시간을 죽이는 달콤함에 얼마를 숨도 안쉬는 것처럼 꼼짝하지도 않고 앉아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어릴 때 장마 비가 오는 낮에 툇마루에 앉아 내무릎을 키우던 진돗개에게 내주고 기와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댓돌에 움푹 패인 자국을 남기는 것을 보던 광경이 생각난다.

비가 내리던 광경이 추억과는 동떨어져 눈에 그 모습만 삼삼하다. 

옛날의 어떤 광경이 생각나면 추억에 연결 되어야 하는 데 비오는 모습은 따로 떠오른다.

시카고를 가던 고속도로 위에서 갑자기 만난 엄청나게 쏟아져 내리던 폭포수같던 폭우는 지평선이 보이던 넓은 경치를 감추고 마치 잡아 먹을 것처럼 덤벼 들어 마치 엄청나게 커다란 괴물의 뱃속에 들어가는 것 같았었다.

나이아가라폭포에서  갑자기 만난 소나기가 품어 안은 폭포의 모습에서 느껴지던 신비한 기운은 물 속에 잠겨 있다가 품어져 나오는 듯했다.  비오는 날 용이 승천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마존 밀림 속에서 순간적으로 만난 폭우는 열대수림의 넓은 잎사귀에 빗방울을 튕기기 시작할 때 잠깐 시원한 청량감에 반갑다가 이내 그 엄청난 쏟아지는 빗물과 발 아래 늘어나는 물줄기로 공포스러웠다.

하와이의 소나기는 바위산에 순식간에 수백개의 하늘폭포를 만들어 주변을 꿈속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물을 품지 못하는 바위산은 금방 폭포를 감추어 버렸다.

이제까지 보았던 비 오던 수많은 광경이 머리 속에 감쳐져 있던 창고에서 하나씩 튕겨 나온다.

한국에서 무덥던 여름날 시골길을 휘적거리고 가다가 만난 소나기로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 구멍가게에서 비를 피하다가 처음 보는 마을사람과 순식간에 친해져 막걸리 파티가 벌어졌던 추억이 담긴 소나기가 제일 그립다.  처음 빗방울이 떨어질 때 흙바닥에 튕기면서 함께 피어 오르던 흙냄새까지 선명한 기억이 많이 생경스럽다.

성기범

뉴욕 2011년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