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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1월 06일 (목) 08:31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

우리나라 선지종찰(禪之宗刹) http://sudeoksa.com

수덕사

명칭의 유래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 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승가람마의 준말: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집)은 극히 퇴락이 심해 절을 새로 지어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절에서 밥 짓는 중)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이 미모가 빼어나서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심산굴곡인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이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중 신라에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어 들어가려 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 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 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 모양의 버선 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경을 본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고 바위 속으로 사라진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각지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형성배경(창안동기)
백제 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 (554∼597) 재위 시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기와의 마구리)은 벡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경위(전개 또는 발전과정)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이 만들어 낸 덕숭산은 북으로는 가야산,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우뚝 서 있다.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고 낮은 구릉과 평탄한 들녘이 서로 이어지며, 계곡이 골마다 흘러내리는 이 곳은 옛부터 소금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여기에 불조(佛祖)의 선맥(禪脈)이 면면히 계승되고 많은 고승 석덕(碩德)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잡고 있다.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백제 위덕왕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헌에 수덕사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와 속고승전으로 백제의 고승 혜현이 수덕사에 주석하며 법화경을 지송하고 삼론을 강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의 사격(寺格)이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수덕사는 관련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으나 다행히도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한 국보 제 49호 수덕사 대웅전과 통일 신라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여러 유물이 남아있어 대가람으로서의 융성하였던 면모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수덕사는 전반에 편찬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덕숭산 내에는 취적루와 물운루의 2개의 누각이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는 대웅전 이외에 2개의 누각이 있을 만큼 대가람의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年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 (1528년)에 대웅전 색채 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처마를 위쪽으로 올라가게 하여 멋을 내려고 장연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보수와 풍판(풍우를 막기 위하여 박공 아래에 길이로 연이어 대는 널판지)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오늘날의 수덕사는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이 반포되어 불교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통합하고 30본산제를 실시할 당시 수덕사는 충남 대본산인 마곡사의 말사였다. 이 후 1962년 비구(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남자중), 대처(살림을 차리고 아내와 자식을 둔 중) 통합으로 대한 불교 조계종 비상종회에서는 새로운 종헌을 의결하였고, 3월 25일 공포된 종헌에 의해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7교구 본사로 승격, 현재는 42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그리고 1984년 11월 29일 중앙총회의 의결로 수덕사는 근대선풍을 진작한 선지종찰임이 인정되어 총림으로 승격, 이름을 덕숭총림이라 하고 초대방장에 혜암스님을 추대하였다. 1996년 과거 강원(江原: 불학을 전문으로 닦는 사원)을 운영했던 전통을 되살리고, 부처님의 법을 후학에게 전수할 목적으로 1996년 개설된 수덕사 승가대학에서는 여러 학인들이 청강과 강론에 전력하고 있다. 수덕사 승가대학은 불교 전통방식의 수업내용과 더불어 현실에 맞는 불교사 및 외전(外典)을 겸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한·일 불교 문화교류를 위해 1986년에 일본 아스카사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오늘날까지 매년 방문단을 왕래하며 꾸준한 불교문화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1998년 11월에 개관한 근역성보관(불교박물관)은 불교 성보를 수집, 조사, 보존, 전시함으로써 유물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의 축적과 더불어 불교 문화의 이해와 가치 재인식의 장을 마련하였다. 근역성보관은 본·말사 내 불교 문화재 6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향토지적재산의 내용적 특징

사찰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지나게 되는 일주문(一柱門)은 여기에서부터 사찰의 경내가 시작됨을 일깨워주는 알림의 문이다. 일주문이란 '부처님을 향한 모든 진리는 하나' 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수덕사 일주문은 기둥 사이에 공포(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둔 나무쪽들)가 짜여 있는 다포계 형식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소전 손재영이 쓴 "덕숭산수덕사(寺德修山崇德)"와 "동방제일선원(院禪一第方東)"이라는 현판을 걸어 사찰의 격을 나타내고 있다. 1960년에 신축되었으며, 1998년 법장스님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일주문을 거쳐 70여 미터를 올라가며 금강문이 나오고 50여 미터를 올라가면 천왕문이 나온다. 금강문(金剛門)과 천왕문은 1999년에 만들어 놨다. 천왕문(天王門)을 거쳐 50여 미터 올라가면 황하정루(黃河精樓)가 나온다. 황하정루는 대웅전을 보호하고 사세를 안정시키는 중요한 전위누각(前衛樓閣)으로 1985년에 불사를 시작하여 1992년도에 준공하였으며, 1994년에 법장 스님에 의해 이전 개축되었다. 황하정루라는 명칭은 덕숭총림 방장 원담스님이 명명한 것으로 황(黃)은 부처님의 정신을 뜻하며 하(河)는 큰 강이 흐르듯 정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재 이 누각의 지하에는 박물관인 근역성보관이 있고, 지상 일층은 스님들이 거처하시는 요사로, 이층은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선지종찰수덕사(禪之宗刹修德寺)와 황하정루(黃河精樓) 현판은 원담 스님의 글씨이다. 황하정루를 지나 80여 계단을 올라가면 대웅전이 모습을 보인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 49호(1962.12.31 지정)이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세워진 수덕사 대웅전은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한국 목조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 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계통의 건물이다.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특히 소꼬리 모양의 우미량(牛尾樑)은 그 중 백미를 꼽을 수 있다. 내부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고 과거에는 바닥에 전돌이 깔렸으나 현재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다. 외부에 그대로 노출된 가구(架構)에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수덕사 대웅전은 건물의 기능미와 조형미가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특히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가 만들어내는 구도는 수덕사 대웅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형미와 역사적 가치로 인하여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은 현존하는 건물 중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목조건축물이다. 대웅전 안에 대웅전 벽화, 대웅전 불상, 후불탱화, 소종등이 있다. 대웅전 오른쪽 옆에는 명부전(冥府殿)이 있다. 명부전은 지옥 중생의 이고득락을 기원하는 전각으로 주존은 지옥 중생의 구제를 서원한 지장 보살이다. 전각내에는 지장보살과 유명계 판관인 시왕이 봉안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덕사 명부전은 1968년에 원담스님이 건립하였으며, 지장보살 후면에는 목각후불탱과 목조시왕상을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명부전 뒷편에는 방장스님의 처소인 염화실이 있다. 대웅전 계단을 내려오면 좌측에는 백련당, 우측에는 청련당 등 두 개의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들은 스님들의 거처로 쓰이는 요사로 대웅전에서 보았을 때, 청련당이 좌청룡, 백련당이 우백호를 상징한다. 백련당은 1926년 만공스님이 초창하고, 1993년 법장스님이 개창하였다. 그리고 청련당은 1974년 견성암 건물을 축소 이전하여 건립한 것으로 처음에는 '?'자형 건물이었으나 1997년 '遁'자형으로 법장 스님이 개축하였으며 아래에는 식당 168평을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덕사 앞 마당에 삼층석탑과 칠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도지정 유형 문화재 103호)은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하고 원효대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지나 통일 신라시대 양식을 한 고려초기의 석탑이다. 체감율이 정연한 이 석탑은 전체적인 형태에서 안정감이 있다. 칠층석탑(도지정 문화재 자료 181호)은 1930년 당시 수덕사 주지였던 만공 선사가 건립한 것으로 기단부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되어 있다. 탑 양쪽으로 법고각(法鼓閣)과 법종각(梵鐘閣), 수덕사 범종 등이 있다. 법고각 내부에는 목어, 운판, 법고가 봉안되어 있으며 범종각 안에는 수덕사 범종이 있다. 그리고 덕숭산 산내에는 정혜사, 전월사, 금선대, 향운각, 소림초당, 견성암, 환희대, 만월당, 선수암, 운수암, 극락암 등의 산내 암자들이 있다.

출처: 충청남도 향토지적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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