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짜기식 문화권에선 광장은 태어나지 않았다.

유럽의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넓은 광장을 만나게 된다.  시민들이 모이기 쉽게 대개 한복판에 있어 지도에서 찾기 쉽고 또 교통이 편리하여, 여행자인 나는 이곳을 기점삼아 갈 길을 찾곤 한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기슭에는 옛 아고라(Agora)의 유적이 남아 있는 데, 광장의 역사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나는 아테네 여행 중 이곳을 찾아, 부서진 돌기둥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그곳에서, 매일 오후 나타나 청년들과 문답식 대화를 주고받는 소크라테스의 진지한 모습과, 직접 민주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자신에 찬 모습을 그려 보곤 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거기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토로했고, 연극과 음악의 재능을 선보였으며, 시와 웅변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아고라는 시장과 재판소의 기능도 하며 아테테를 민주정치의 요람이 되게 했다.

그리스에 이어 유럽 문명의 맹주가 된 로마 제국은 아고라를 본떠서 ‘포로(Foro)’라는 것을 두었는 데, 로마 가운데에 폐허로 남아 있는 포로 로마노(로마광장)는 그 대표작으로서 늘 여행객으로 붐빈다.  포로는 아고라와는 사뭇 달랐다.  여기는 로마 시민뿐만 아니라 속지(屬地)의 시민들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으니, 그 같은 포로의 개방성, 포용성에 힘입어 로마는 아테네와는 달리 세계 제국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 포로에서 공화제라는 민주정(民主政)을 탄생시켜 민주주의 발전 도정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으며, 그 후  유럽의 모든 도시는 포로, 즉 광장을 어김없이 두게 됨으로써 광장은 서구 사회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나는 이런 서유럽의 광장 문화를 보면서, 왜 우리는 광장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지 못해 민주주의의 지각생이 되어 오늘 우리가 그네들의 문물을 따라 배우지 않으면 안 되나하고 몇 번이나 조상들을 못난이라 나무랐다.  물론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시아 국가 모두가 그렇다.

아시아 대륙 최초의 광장인 북경의 천안문 광장이 등장한 것은 중국 땅에 인민을 주인으로 한다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1949년이었다.  그 것 역시 서민들의 주체적 행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 후 평양과 서울에도 광장이 생겨 났으나, 어쩐 일인지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와 독재자에 대한 환호만 있었지 시민 문화는 싹트지 않았다.

이제 여의도 광장마저 시민 공원으로 바뀌었으니 우리에게는 그런 광장도 없다.

그러고 보니 광장은 우리의 체질이 아닌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힘들게 조성했던 광장을 다시 허물지는 않았을테니까.  우리는 광장이 없어도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그런 문화를 일구어 온 민족이 아니었던가.  광장은 아테네와 로마와 같이 돌로 집을 짓는 땅에서만 존재 의의를 가진다.  돌로 집을 짓기에 벽이 두껍고 창이 작아 자기만의 세계를 갖게 된다.  쌓기식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안전과 프라이버시의 완벽한 보호다.  그들이 일찍이 노크(Knock) 문화를 만들어 낸 것만 보아도 그렇고, 초대 하지 않은 사람이 불쑥 찾아 오는 것을 가장 무례한 짓으로 받아 들이는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집이 방어 기능에만 충실하거나 개인의 프라이버시만을 효과적으로 지켜 준다고 해서 집의 기능을 다한다고는 할 수 없다.  카메라는 사진을 잘 찍으면 되고, 자동차는 안전하고 빠르게 달리면 일단 합격이지만 집은 그렇지가 않다.  그 것은 매우 넓은 활동 영역을 가진 인간의 삶을 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몇 가지 특정 기능을 잘해낸다고 해서 반드시 집의 ‘성능’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집이라는 ‘제품’은 카메라나 냉장고, TV와 같은 상품과는 다른 것이다.

집은 또 가족 공동체의 삶을 담는 그릇이긴 하지만, 가족 공동체는 마을 공동체, 나아가 지역 공동체와 유지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서는 자신의 안녕과 이익을 도모해 나갈 수가 없다.   철저하게 외부와의 차단을 추구해 온 유럽의 석조 문화권 사람들은 공동체 구성원끼리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마당 역할을 할 무언가를 필요로 했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광장이었다.  그리고 마을 주민 모두가 쉽게 만날 수 있도록 마을 한가운데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늘 얼굴을 맞대고 살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며,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도 알고 살았던 우리에게는 광장이란 이름의 별도의 공적 공간(Public Space)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장 문화를 탄생시키지 못했고, 또 그런 문화를 체질화시키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탓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우리식의 대화 채널을 유지하고 있다면 말이다.

권삼윤

문명비평가, 역사기행가

‘우리건축, 틈으로 본다’  발췌,    대한교과서 발행